즈진청(紫禁城 자금성) 600살 맞아

스물네명 황제의 영욕과 흥망을 증명

 

 

이 600년 동안 즈진청(자금성)은 명청(明清)시대 스물네명 황제의 영욕과 흥망을 증명하고 있으며, 이 600년 동안 즈진청은 일찍이 외세의 침략자들에게 짓밟히고 약탈을 당했고, 이 600년 동안 역사의 발전과 시대의 변화를 즈진청은 증명하고 있다.

여러세대에 거쳐 문화재 작업자들의 구조와 복구 속에서 즈진청(紫禁城 자금성)은 다시 활기를 띄고있다.

 

 

 

2020년 즈진청(紫禁城 자금성)은 600살을 맞이했다.

황실의 황궁에서 부터 백성들의 박물관에 이르기 까지

즈진청은 명(明), 청(清) 양대 500여년 왕조의 교체를

증명하고 있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또하나의 "왕홍(网红"으로 자리잡고 있다.

즈진청은 세계 최대규모의 궁궐 건축군이며

또한 180여만 점이나 되는 소장품을 수장하고 있다.

 

 

 

 

 

 

베이징(北京 북경)의 고궁은

중국 명청(明清) 양대 황실의 궁전이며

옛 이름은 즈진청(紫禁城 자금성)으로

베이징 중측선(中轴线, 중앙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베이징 고궁은 3대전(三大殿)을 중심으로

부지면적은 72만 평방미터이고, 건축면적은 약 15만 평방미터에

크고 작은 궁전이 70여 채가 있으며,

가옥 9천여 채를 갖추고 있다.

 

 

영화 《末代皇帝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중

 

베이징 고궁은 명 성조(明成祖) 영락(永乐) 4년(1406년)에
건설을 시작했으며,
난징(南京 남경) 고궁을 원본 모델로 하여 건설했고 
영락 18년(1420년) 건설을 완공했다.
베이징 고궁은 직사각형의 성지로 남북의 길이는 961미터,
동서의 넓이는 753미터이며,
4면이 높이 10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밖에는 넓이 52미터의 호성하(护城河, 해자)가 있다.
즈진청의 내부의 건축물은 외조(外朝)와 내정(内廷) 등
두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조(外朝)의 중심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으로 총칭 삼대전(三大殿)으로 부르며
국가의 대례를 거행하는 곳이다.
내정(内廷)의 중심은 건청궁(乾清宫),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宁宫)으로 총칭 후삼궁(后三宫)으로 부르며
황제와 황후가 거주하는 정궁(正宫)이다.

 

 

영화 《末代皇帝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중

 

베이징 고궁은 세계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이며
가장 잘 보존된 목조 건축물 중의 하나로
국가 AAAAA급 여유경구(旅游景区, 관광지)이다.
1961년 첫번째 전국중점 문물보호 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중국 고대사회는 "天人合一 천인합일"의 기획 이념을 중시했고
하늘의 별과 도성의 계획을 대응하여
정권의 합법성(合法性)과 황권의 지고성(至高性)을 부각시켰다.
옥황상제는 즈웨이궁(紫微宫 자미궁)에 거주하였고
인간 황제는 하늘의 명을 받은 "天子 천자"라 자부했으며
거소(居所, 거처)는 즈웨이궁에 있는
옥황상제와의 대응을 상징해야 했다.
《后汉书 후한서》에 "하늘에는 즈웨이궁이 있으며
옥황상제의 거소이다.
제왕(王者)이 입궁하는 것은 그곳에 드는 것과도 같다"고 싣고있다.
즈웨이(紫微 자미), 즈위엔(紫垣 자원), 즈공(紫宫 자궁) 등이
제왕 궁전의 별칭이 됐다.
봉건황국은 고대에는 금지구역에 속했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은 들어갈수 없었다.
그래서 "즈진(紫禁 자금)"이라 불렀다.
명조(明朝) 초기에는 와이진위엔(外禁垣 외금원)과 함께
"皇城 황청(황성)"이라 통칭하여 불렀고
대략 명조(明朝) 중말기 즈음 와이진위엔(외금원)과 구별하기 시작했고
즉 궁성(宫城)을 "즈진청(紫禁城 자금성),
와이진위엔을 "황청(皇城 황성)"이라 불렀다.

 

 

영화 《末代皇帝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중

 

베이징은 원래 연왕(燕王) 주체(朱棣)의 봉지였다.
정난의 변(靖难之役) 이후 영락(永乐) 원년(1403년)에
예부상서 이지강(李至刚, 1355~1426년) 등은
옌징 베이핑(燕京北平 연경북평, 베이징의 옛 이름)을
황제 "용흥의 땅(龙兴之地)"이라 불렀고,
명 태조(明太祖)가 펑양(凤阳 봉양)에 한 방법을 본받아
수도를 반드시 세워야 한다고 했다.

명 성조(明成祖)는

옌징베이핑푸(燕京北平府 연경북평부)의 지위를 크게 승진시켰고

베이핑(北平 북평)을 베이징(北京 북경)으로,

베이핑푸(北平府 북평부)를 순톈푸(顺天府 순천부)로 바꿔

"씽자이(行在 행재, 황제가 있는 곳)"라고 불렀다.

동시에 사람들을 베이징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강제로 베이징으로 옮겨온 사람들은 각지의 유랑민(流民 유민),

장난(江南 강남)의 부자와 산시(山西 산서)의 상인 등

평민(百姓 백성) 등이 있었다.

 

 

영화 《末代皇帝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중

 

영락(永乐) 4년(1406년) 명 성조(明成祖)가

난징황궁(南京皇宫 남경황궁)을 본으로 삼아

베이징황궁(北京皇宫)과 성벽(城垣 성원) 건설을 명령했다.

명 성조(明成祖) 주체(朱棣)는 먼저 인원을 파견하여

전국 각지의 진귀한 목재와 석재를 채굴했고

이후에 이 자재들을 베이징으로 운송했다.

단지 준비작업으로만 11년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진귀한 녹나무(楠木 남목)은 주로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 등지에서 자랐고

백성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산으로 들어가 채목했으며

이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

후대에 "入山一千,出山五百 입산일천, 출산오백

-일천명이 산에 들어가 오백명만이 살아온다"는 말을 남겨

나무를 채목하는데 생명을 댓가를 지불했다고 말하고 있다.

 

 

궁전을 건조하는데 필요한 석재의 채굴 또한

마찮가지로 매우 고생스러웠다.

바오허뎬(保和殿 보화전) 뒷편의 가장 큰 단폐석(丹陛石)은

베이징 서남쪽의 팡산(房山 방산)에서 채굴했다.

이 단폐석을 옮길때의 광경을 역사책에 기록된 것을 보면,

수만명의 노동자들이 길 양쪽의 매 1리마다 우물을 파고

추운 섣달 기온이 충분히 내려갔을때

우물에서 물을 길어 길에 뿌려 얼음길을 만들었고

28일 만에야 겨우 궁안에 도착할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 쑤저우(苏州 소주)에서는

황실 건축에 사용할 벽돌인 금벽돌을 굽고,

산동 린칭(山东临清 산동성 임청시) 또한

베이징으로 벽돌 공물을 보내야만 했다.

 

 

영화 《末代皇帝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중

 

영락(永乐) 7년(1409년) 명 성조(明成祖)는

베이징을 기지로 북정을 하면서

베이징 부근의 창핑(昌平 창평)에 장링(长陵 장릉)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의 왕릉(陵墓 능묘)를 난징이 아닌 베이징에 조성했다는 것은

명 성조(明成祖)가 이미 천도를 결심했다는 증거이다.

 

 

영화 《末代皇帝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중

 

영락(永乐) 14년(1416년) 명 성조(明成祖)는

군신(群臣, 뭇 신하)들을 소집하여 베이징으로의 천도를

정식으로 상의했다.

반대의견을 낸 군신백관들에 대해 명 성조(明成祖)는

면직 혹은 엄중 처벌 했으며,

그때부터 천도에 대해 감히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이듬 해 난징의 즈진청(紫禁城 자금성)을 모델로 한

베이징의 즈진청(紫禁城자금성)을 정식으로 시공했다.

 

영락(永乐) 18년(1420년) 베이징 황궁(北京皇宫 북경황궁)과

베이징청(北京城 북경성)을 완성했다.

베이징 황궁(北京皇宫)은 난징 황궁(南京皇宫)을 모델로 한것이며

규모는 약간 크다.

새로 건설한 베이징청(北京城)의 둘레는 45리이며

규칙적인 사각형을 이루고 있고

《周礼·考工记 주례고공기》 중의

이상적인 수도의 형상과 부합하고 있다.

 

 

명 성조(明成祖)가 정식으로 천도를 선포하고

금릉응천부(金陵应天府)를 난징으로 바꿨으며

베이징 순천부(北京顺天府)를 경사(京师, 수도)로 바꾸었으나

난징에 여섯개의 부 등 중앙기구를 남겨두고

난징 모(某)부라 칭했고

이로써 난징은 유도(留都, 천도 이전의 옛 도읍)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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